무게를 최대한 줄인다고 쬐그만 카메라 리코 GX200을 거금을 주고 새로 구입했는데
불량품인지 받침대에 올려 놓고 찍어도 흘들려 나오니
이걸 그냥, 부셔 버려 ?
첫날 2008.11.24
아침7시 집에서 출발
10:05 프랑스(드골공항)행
비행11시간 40분 예정
도착: 파리시간 오후 2시 한국시간 오후 10시
외부온도 5도, 날씨:구름잔뜩 가끔 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문제가 발생 2시간정도 지체가 되었다.
(누군가 짐을 놓고 내려 폭발물 로 오인 조사가 완료된 후 입국심사 허용)
지루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평없이 기다리는데 시차때문에
눈이 꺼칠하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공항에서 나와 몸파르나스 기차역행 리무진버스를 탔다.
그 곳까지 1시간 정도 소요.
몸파르나스기차역에서 내려 호텔을 찾아가는데 프랑스아주머니의 친절한 도움을 받았다.
문제는 많은 양의 짐이다.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지만 어깨에 맨 큰 배낭 빼고도
3개의 큰 덩치의 짐무게가 50KG이다.
출발할 때 공항에서도 15만원의 오버챠지를 더 내고 왔다.
겨우 겨우 고생하는 마음으로 호텔에 도착하니 피곤이 몰려온다.
계획했던 파리 시내투어는 오는 길로 미루고 저녁도 안먹고 7시 잠에 빠져들었다.
(노틀담성당. 기적의 패 성당, 파리외방전교본부, 몽마르트언덕까지 전부보려고 했는데..
카메라가 출발 사진부터 불량이니 큰일이군,
둘째날 날씨: 흐리다 맑았다. 2008.11.24
오전 7:00 호텔 아침식사 후 주변산책
9:00 호텔체크아웃
몸파르나스 기차역으로 출발
10:10발 루르드행 TGV기차 탑승
오후 3:50 도착예정
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아침에 생각보다 몸이 가볍다.
호텔의 아침식사는 빵중심으로 햄, 치즈, 요거트, 커피가 주요식단이다.
배가 고파서인지 무엇이든지 맛이 있다. 식사 후 호텔주변을 산책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손하고 얼굴이 시려울 정도다(영상 1도 정도)
주변에 공원표시가 되어 있어 찾아갔더니 공동묘지다. 아침부터 죽은 영혼에게 화살기도를 하다.
도심속에 공동묘지겸 공원이라..
수백년된 몽파르나스공동묘지는 유명인사들이 많이 묻혀 있다고한다. 예로 모파상등등...
음산함 보다는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기차역으로 출발.
10:10 루르드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기차밖의 풍경, 산이 전혀보이지 않는
프랑스 시골평원이 평화로워 보인다.
끝없는 평원, 비옥한 땅, 이곳이 하느님의 축복의 땅이구나
하고 느끼는데 루르드를 한정거장 남기고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하얗게 눈이 덮인 피레네 산맥과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풍부한 양의 계곡물.
산과 물이 어우러진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게 다가올수가!
그리고 그 안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마을을 보며 성모님의 축복이 가득한 마을임을 느꼈다.
동시에 저길 자전거를 타고가?? 기차안에서 경찰이 여권과 티켓검사를 한다.
역에 도착하니 저희 본당에 계신 안나수녀님의 소개로 미리 전화 연락했던
소피아 수녀님 외 한분이 마중을 나와 계신다.
이분들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서 파견하여 루르드성당에 상주하시는 분들이다.
친절하게 맞아주시는 수녀님들께 반가움과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우리의 많은 짐을 보고 놀라신다.
수녀님께서 승용차를 가지고 오셨지만 티코와 비슷한 작은 차라서 짐만 싣고
우리는 걸어서 호텔로 이동했다..
큰 걱정을 덜어주신 수녀님 감사합니다.
5시에 로사리오 성당에서 미사가 있는데 참석 할꺼냐고 하기에 ‘당연하죠’ 했더니
오자마자 미사 볼 생각부터하고 기특하다고 칭찬을 하신다. 흐흐흐...
짐을 방에 옮기고 재빨리 성당으로 향했다.
소피아 수녀님은 수녀원으로 가시고 작은 수녀님께서 이곳저곳 설명해 주셨다.
먼저 기적의 샘물로 목을 축이는데 옆에서 내 또래의 한국아줌마가 물로 여기저기를 씻어댄다.
]
노르웨이에 사는데 혼자 프랑스 여행중이란다.
영어가 되기 때문에 혼자 여행하는데 문제가 없단다. 부럽다.
성모님 발현동굴 앞에서 성모님께 인사를 올렸다.
모든분들을 떠올리며 성모님께서 함께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동굴 벽에 대고 열심히 기도하는 한국 아가씨가 눈에 들어온다.
한달간 프랑스 여행중이란다. 여기가 마지막 코스라고 수녀님께 가이드를 부탁한다.
내일 9시에 함께 만날 약속을 하고 수녀님은 떠나시고 우리는 미사에 참여했다.
성당내부는 돔 형태로 벽면은 제대를 포함 양 옆으로 신비의 5단이 성화로 그려져 있다.
환희, 고통, 영광, 1901년에 지어진 성당이라 빛의 신비는 성당밖의 입구에 그려져 있다.
미사를 끝내고 나오니 날은 벌써 깜깜해졌고(5시면 해가 져서 컴컴하고 기온도 뚝 떨어진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환하게 조명을 받고 계신 성모님 위로 내리는 눈이 너무 아름답다.
아쉬워서 기적의 물을 한번 더 마시고 호텔로 향하는데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식당도 ,빵집도, 편의점도 없다. 비수기여서 더욱 썰렁하단다.
배가 고파 호텔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비싸도 너무 비싸다.
간단하게 시켰는데도 둘이 10만원 돈 나왔다.
집에 두고 온 김장김치와 속이 노란 호박고구마를 생각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어버렸다.
여러개의 수돗꼭지에서 기적의 물을 마음껏 마시고 병에 담아 갈수있게 물이 꽐꽐 나온다.
셋째날 날씨: 잔뜩 흐리고 매우 추운 겨울
수녀님과 9시에 만나기로 하였다.
시차적응이 안돼서인지 2시경에 눈이 떠졌다. 한국시간으로 7~8시 일어날 시간이다.
뒤척이다 다시 잠들었는데 즈키리아는 캄캄한 새벽4시에 나가 동네를 한바퀴 돌고 왔단다.
아침을 먹고 8시 30분쯤 밖을 나오니 날씨가 너무 춥다.
구름이 껴서인지 어둑한게 금방 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
너무 추워서 인근 상점에서 털모자를 사서 쓰니 조금 낫다.
수녀님도 코끝이 빨갛다. 수녀님의 자세한 설명과 함께 박물관, 비오10세 성당,
성녀가 처음 영성체한 병원,
성녀가 처음 세례 받은 성당, 어린시절 살던 까슈(감옥을 개조한 방)
성녀의 부모님이 살던 집 등을 돌아봤다.
11시 40분쯤 수녀님과 헤어지고 다시 성모님발현지로 와서 기적의 물을 실컷 마시고
인근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수녀님께서 간절히 권하신 기적의 물에 추워서 침수를 할까 말까 생각하며
양만 많고 정말 맛없는 점심식사다.(다음부터는 1인분만 시켜서 나눠먹어야지)
침수는 비수기라 오전 1시간(10~11) 오후 1시간 (2:15~3:30),
하루에 2시간 밖에 안한다. 성모님 동상 앞에서 얼쩡거리다 맨 먼저 줄을 서서 첫번째로 들어갔다.
얼추 20여명 되는 듯 싶다.
찬물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잠깐 담구는 거라 그리 추운 줄 몰랐다.
봉사자들의 노고가 너무 많다.
“잡병과 피곤을 없애 주시며 이번 순례길 무사히 마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렸다.
즈카리아 말처럼 너무 은혜를 많이 받는 듯 싶다. 지금까지의 여행 너무 순조롭고 황홀하다.
감사의 기도를 드린 뒤 동네를 한 바퀴 더 돌고 내일 떠날 준비를 위해 호텔로 오며
엽서와 성물병을 샀다.
너무 많이 걸어서 다리가 뻐근하다.
저녁은 오늘도 생략이다.
로사리오 성당에서
비오 10세 성당 옆에 박물관이 있으며 .
성모님을 발현한 벨라뎃다 수비루 성녀의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비오10세 지하성당
비오 10세 성당은 지하에서 3만명이상이 미사에 참여할수 있을만큼 크다.
성녀의 어렸을때 모습.
이곳은 염원을 담아 기적의 물에 침수하는 곳이다.(사진촬영을 해선 안되는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옆에 연세가 많으신 봉사자 할아버지 두분이 맨몸인 저의 양팔을 잡으시고
어름처럼 찬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담갔다 일어나는 저를 부축여 주십니다.
차례를 기다리며 ,
다행이 한 겨울이라 방문자가 많치 않아 일찍 끝났으나
여름 성수기는 줄이 몇백 미터씩 된다고 합니다.
루르드 [프] Lourdes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소도시로 성모 마리아 발현지.
루르드 성지는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번에 걸쳐 성모 마리아가
성녀 벨라뎃다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에게 발현함으로써 세간의 이목을 끌었으며,
많은 병자들이 이곳을 방문한 후 병이 치유됨에 따라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성모 발현과 메시지]
어머니를 대신하여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던 벨라뎃다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하는 열네 살까지 문맹이었고 종교
교육조차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식까지 앓고 있었다.
1858년 2월 11일 목요일 정오경 나무와 짐승의 뼈를 줍기 위해 마을에서
서쪽으로 1km 떨어진 가브(Gave) 강변의 동굴 근처로 간 벨라뎃다는,
강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고 있었는데 이상한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하늘은 잠잠하였고 나무들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동굴의 움푹 들어간 자리에서 후광이 빛나고 흰 옷에
하얀 베일과 파란 색 허리띠를 두르고 양 발 위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아주 '젊게 보이는 어떤 여인'을 보았다. 벨라뎃다는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미소를 띠고 서 있는 그 여인 앞에서 잠시 묵주 기도를 바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에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으나,
그 비밀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그녀의 어머니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그 일로 둘은 담요를 털 때 사용하는 방망이로 어머니에게 맞았지만,
벨라뎃다는 2월 14일과 18일에 또다시 동굴로 갔다. 그때 '동굴의 젊은 여인'이
"앞으로 15일 동안 매일 이곳에 와주시겠습니까?"하고 묻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벨라뎃다는 2월 19일 금요일부터 3월 4일 목요일까지 매일 아침
동굴로 갔으며, 2월 22일 월요일과 2월 26일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동굴의 젊은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매번 그 '여인'은 조금씩 벨라뎃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8일째인 2월 24일 수요일에 "회개하시오. 죄인을 위해 기도하시오.
죄인의 회개를 위한 상징으로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시오"라는 메시지를 전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손가락으로 샘물의 원천을 가리키며 그 물을 마시고 씻도록 하였다.
또 13일째인 3월 2일 화요일에는 "사제들에게 전해
이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게 하고,
이곳에 성당을 짓게 하시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이야기는 곧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져 이 '동굴의 젊은 여인'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2월 21일에는 10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15
되던 3월 4일에는 8,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모두 위대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사람들은 실망하고 흩어졌다. 이제 모든 일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3월 25일 목요일 아침, 벨라뎃다가 다시 동굴로 갔을 때 이 '젊은 여인'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네 번에 걸쳐 반복된 질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던 이 '여인'은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 Immaculata conceptio"라고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벨라뎃다는 곧바로 마을의 주임 신부에게 보고하였다. 이 발현이 있기 4년 전인 1854년에 이미 당시의 교황 비오 9세는 동정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믿을 교리로 발표하였으나,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로써 벨라뎃다는 전세계에 루르드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의 전령자가 된 것이다.
이후 그녀는 4월 7일 수요일과 7월 16일 금요일에 다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볼 수 있었는데, 4월 7일에는 촛불이 벨라뎃다의 손가락에서 오랫동안 탔지만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기적이 있었고, 이 일은 7월 16일 다시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 7월 16일 발현에 대해서는 그녀가 자세하게 언급하기를 회피하여 아직까지 비밀로 되어 있다. 타르브(Tarbes) 교구장 로랑스(Laurecce) 주교는 성모 발현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에 착수하였는데, 그녀의 증언, 기도와 회개 운동 그리고 많은 치유 기적에 근거하여 1862년 1월 18일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로랑스 주교의 교서는 성지 순례의 토대가 되는 인정서였다. 그는 교구 내 신자들에게 '루르드 동굴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소망에 응답하기 위한 성당을 동굴 위에 건립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벨라뎃다와 동굴을 보기 위하여 루르드에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성지화 작업 및 성당 건립]
1864년 4월 4일, 여러 주교들과 200여 명의 신부들을 비롯하여 1만 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체 거동과 더불어 루르드의 성모상이 축성되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동굴을 중심으로 한 성당 건립이 시작되었다. 동굴 위에 건립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성전은 크게 지하 성당, 상단부 대성전, 로사리오 대성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성 비오 10세 대성전이 있다.
1866년 5월 19일 벨라뎃다가 참석한 가운데 봉헌된 지하 성당은 뾰족 아치로 된 세 개의 중앙 회중석이 모두 28개의 짙은 색 대리석 기둥에 의해 떠받쳐 지고 있으며, 기둥 상단부는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앙의 제대는 1966년과 1973년에 개수되었으며, 제대 위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이 안치되어 있고, 이곳에서 성체 현시가 이루어진다. 성당 폭은 가장 넓은 곳이 10m이며, 길이는 25m이고 높이는 중앙 회중석 아래 부분이 가장 높아 4.2m에 이른다.
1862년 처음으로 구상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성전은 13세기 고딕 양식 설계로 이루어졌는데, 1871년에 낙성되고 1876년에 축성되었다. 고딕 양식의 종루는 그 높이가 지상 70m에 이르며, 금색이 칠해진 중심부는 성모 마리아가 벨라뎃다에게 원죄 없는 잉태를 알려 준 말씀이 문자로 새겨져 있다. 입구 중앙에는 왕관을 쓴 루르드의 성모상이 있으며, 성당 후면부에는 여러 개의 소성당이 있는데 이 소성당들은 각각 로사리오의 성모, 승리의 성모, 가르멜 산의 성모, 살레트의 성모에게 봉헌되었다. 성당의 중앙 회중석과 중심부에는 성모 마리아의 일생이, 각 소성당에는 루르드에서의 발현, 순례, 벨라뎃다의 일생이 그려진 스테인드 글래스 있다.
신비잔틴 양식으로 설계되어 1881년부터 착공된 로사리오 대성전은 1889년에 완공되어, 1901년 10월 6일 교황 레오 12세의 교황 대사에 의해 축성되었다. 성당 내에는 15개의 소성당이 있으며, 약 2,0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다. 지하에 길이 200m, 폭 81m의 규모로 지어진 성 비오 10세 대성전은 1958년 3월 25일에 축성되었는데, 2만 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규모 면에서 거대하다. 성당 내부는 아무런 지주나 기둥도 없이 건축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인 물고기 또는 밀알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1988년 3월 25일 성 벨라뎃다 성당이 17개월간의 공사로 새로이 건립, 축성되었는데, 이 성당은 동시에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순례자들이 여러 형태의 모임을 위해 40명부터 500명까지 들어가는 방들이 있는 이 성당은 햇빛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지어졌다.
[성지 순례와 질병의 치유]
각지에서 오는 순례객들의 수는 점점 증가하여 이미 1872년에 6만명 이상의 순례객이 있었고, 이후 교통 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1908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였다. 1964년이래 매년 300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방문하였으며 현재는 연간 400만 명이 넘는다. 순례객들 중에는 환자들도 있는데, 때로 이들 가운데 병이 치유되는 사례가 종종 보고되었으며, 1866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루르드 연보> 에는 더욱 많은 놀라운 사실들이 보고되고 있다. 1882년 의학적 증명을 위해 의사 생 마클루(Saint-Maclou)가 세운 사무소에서는 1905년까지 총 2,000여 건의 기적적인 치유 사실을 증명하였다. 교황 비오 10세는 시성을 위한 공정한 판단이 될 수 있도록 이 치유 사실들을 이중적 판단, 즉 의학 및 종교적 판단과 함께 교회법에 맞는 형태로 정리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수천 건에 이르는 치유 기적 중에서 각종검사와 실험을 통해 1858-1862년의 8건, 1907-1913년의 33건, 1946-1970년의 24건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현재 루르드는 전세계 가톨릭 신자의 순례지가 되었으며, 기적에 의한 병의 치유도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 한국 가톨릭 대사전, "루르드", 변기찬